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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수다/나-에 세이

그리운 글자들, 그리운 목소리들

by 칼랭 2022.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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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 성장'이라는 제목의 글이 손글씨로 적힌 종이

나눔과 성장

 

언땅이 풀리는 해토의 절기가 오면 흙마당가에 쪼그려 앉아

얼음발속에 뜨겁게 자라는 여린 새싹들을 지켜보느라 눈빛이 다 시립니다.

언 흙을 헤치고 나온 새싹들은 떡잎이 둘로 나뉘면서 자랍니다.

 

나뉘어야 자라는 새싹들

 

그렇습니다. 나누어야 성장합니다.

커지려면 나누어야 합니다.

새싹도 나무도 나뉘어야 자라납니다.

사람몸도 세포가 나뉘어야 성장합니다.

커진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본성입니다.

커나가는 조직은 정보와 지식, 비전과 자유와 책임을 잘 나누어

함께 공유하는 만큼 멈춤없는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누어야 커지고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나누어야 서로 이어지고 함께 모여들어 커질 수 있습니다.

크다는 것은 하나로 이루어 낸다는 것이고

큰사람이란 나누어 쓰는 능력이 큰 사람이고

크게 나눔으로 하나를 이루어내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잘 나누어 상대를 키움으로 자기도 커나가는

지공무사의 사람이 아닌 지공지사의 사람입니다.

나누지 않으면 성장이 정체됩니다.

시들어가고 뒤처지고 부패하고 적대합니다.

나누지 않을때 싸움이 생기고 분열이 생깁니다.

나눔만이 나뉨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눌려면 나눌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늘 새롭게 나누어줄 삶의 감동과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 학습한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하며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보살펴 줄 시간과 물질과 건강이 있어야 나누려는 마음도 자라납니다.

함께 나눌 가치있는 일과 희망과 능력이 생겨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눔과 동시에 자기를 열고 받아드려야 합니다.

[후략]

 

뒤에는 글자가 잘려서, 여기까지만 받아 쓴다.

(띄어쓰기가 맞지 않지만, 그대로 적는다.)

스무살 무렵, 이 글을 내게 적어준 사람은

수업에 출석하는 날보다, 시위에 출석하는 날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혹은, 그랬던 것 같다.

교정의 대자보엔 이 사람의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입학 후 첫 수업에서, 교수는 이 사람에게

"빨갱이"라고 했고,

당장 강의실을 나가라고 명령했다.

이 사람은, 나가지 않았다.

나가지 않는 것이 자신의 권리임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첫 대학을

슬프게 경험했다.

 

그리고 20여년이 흘렀지만,

세계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빨갱이"라고 하고

여전히, '나가라'고 외친다.

사회주의 정권은 대부분 몰락했고,

우리 중 누구도 러시아나, 중국, 북한을 부러워하지 않는데도

여전히 그 체제를 부러워라도 한다는 듯이

멋대로 색을 칠하고, 거짓되게 몰아세운다.

악다구니를 해도, 부자들의 칼질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세계의 추락에 허리가 휘는 밤이다.

 

블로그를 시작하려, 옛 사진들을 정리하다 발견했다.

요즘도 가끔, 나는 이 사람이 생각난다.

아무런 사적 감정도 품지 않았고, 우리는 친했다고 말하기에도 뭣하게

교류가 많진 않았고, 게다가 나는 2학기 무렵부턴 학교를 거의 나가지 않았는데도

그런데도 가끔, 이 글을 써 주었던 오빠와,

나를 시위 현장으로 이끌었던 언니의 얼굴이

가물가물 떠오를 때가 있다.

 

지금도, 아마 길을 걸으며

무언가를 외치고 있을 것만 같은

그들의 음성이, 영영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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